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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의 변천사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복식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볼 수있는데 머리에는 관모를 으며 저고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오고 직선으로 교차시켜 여미는 깃형태의 직령교임식으로 외쪽여밈이다. 또 깃 부리 도련에는 다른 천으로 선을 두르고 바지는 가랑이가 좁은 홀태바지 형이다. 그리고 양복바지와 같은 궁고 가랑이가 넓은 광고 잠방이와 같은 바지도 있었다. 치마는 길이가 길고 거단까지 잔주름이 잡혀 있다. 두루마기는 무릎을 내려갈 정도로 길고 저고리와 같이 선도 보인다. 신은 주로 화를 신고 이도 병용하여 신었다.

[고구려]
고구려는 BC 37년에 건국되었다. 원래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적인 문화 위에 웃 북부 중국의 한(漢) 육조문화 그리고 북부 중국을 거쳐서 스며드는 고대 서북방 민족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만주에 진출했던 흉노족을 비롯한 변방의 여러 부족을 통한 스키타이문화 등 북방계 문물과도 접촉했다. 고구려의 복식은 평양 부근과 통구평야 지대이다. 먼저 머리에는 남녀 모두 관모를 썼는데, 남자들은 건, 책, 절풍, 입, 변등을 썼고 여자들은 건귁을 썼다. 북방계 유목민있어던 우리 민족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추위를 피하거나 햇빛을 가리기 위해 '관모'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으로는 '삼국지'의 '부여전'에 금과 은으로 장식한 모자를 썼다고 처음 나온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책이나 절풍을 비롯한 많은 관모가 나타난다. 또'삼국지'난 '후한서'등에는 '고구려에서 는 대가와 주부는 책을, 소가는 절풍을 썼는데, 그 형태는 고깔 모양이었다'라고 씌여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관모는 실용적인 목적외에도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었다. '당서'나 '구당서'의 '동이전'에는 "부인은 머리에 건귁을 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은 고구려의 여인들은 건귁이라는 머릿수건을 즐겨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건귁은 계속 이어져 내려와 근세 이후 개성 이북의 여인들이 많이 쓰던 머릿수건이 이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의 두루마기의 기본형은 곧은 깃에 왼쪽여밈, 좁은 소매였다. 이 두루마기는 저고리인 유가 길어진 것으로,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입었다.상류층에서는 둥근 깃에 오른쪽 여밈, 넓은 소매로 된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 추위를 막기 위해 입던 두루마기는 점차 의례적인 차림으로 바뀌어 갔다. 저고리는 곧은 깃에 좁은 소매, 왼쪽 여밈으로 되어있고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바지는 통이 좁았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은 중국식의 통 넓은 바지를 입기도 하였다. 여자들은 짧은 치맛속에 바지를 덧입었다. 치마는 무용총 접견도에 보이는 승복용 치마를 제외하면 모두 여자의 옷이었다.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허리에서 치맛단에 이르기까지 잔주름이 있으며,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치마 끝에 선을 둘렀다.

남성용관모 절풍여성용관모

[백제]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이다. 시조왕(始祖王)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 후 마한의 여러 부족국가를 멸망시키고 북으로 대방군을 공격하여 국세를 확장시켰다. 그러는 동안 고구려를 통해 북조문화의 영향을 받고 중국 남조문화를 들여와 찬란한 백제문화를 형성하였다. 백제의 초반(AD6C)엔 뛰어난 금속공예술을 보였다. 이시대에 많은 장신구들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복식 모양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나타난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고 본다. 곧 허리까지 오는 저고리에 바지(또는 치마)를 입었고 필요에 따라 포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양의 직공도에 보이는 백제국사의 옷 모양이,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의 옷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한층 확실시되고 있다. 다만 백제국사의 옷 모양에서 특이한 사실은 바지 끝단에 선이 둘러져 있었고 양복바지와 같이 대님을 매지 않고 그대로 입었다는 점이다.
물론 고구려 백화의 인물상에서도 바지 밑단에 가선을 두르거나 부리를 동여매지 않고 입은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의 예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만큼 고구려와 백제의 의복 차이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라]
신라의 복식을 보면, 먼저 관모로는 일반인의 경우 가죽으로 만든 삼각형의 변형모를 많이 썼다. 또한 상류층에서는 금, 은, 옥 등으로 만든 금속제 관모를 예복용으로 썼다. 신라의 의복에서 남자는 허리까지 이르는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는데, 바짓부리는 묶여져 있었다 또한 여자는 허리 아래에 이르는 저고리에 발목까지 오는 긴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이러한 것으로 신라인들의 기본적인 옷차림이 고구려인과 같았다는 것을 뜻한다. 기본 복식 위에 입었던 포도 그 형태가 고구려나 백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신라의 신 또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이와 화가 함께 착용되었는데, 이는 주로 여자들이 많이 신었고 화는 남자들이 많이 신었다. 신의 재료도 천,금속제,흙,풀 등의 다양한 재료가 이용되고 있어 삼국 중에서는 가장 화려한 신발 문화를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화는 크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화가 남녀 모두에게 착용된 고구려와는 달리 신라에서는 남자들만 착용하였으므로 미에 관심이 많은 여자용의 이처럼 다양한 발달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신라의 복식 생활에서 또 하나 특기할 사실은 의료 수공업의 발달이었다. 이는 일찍이 신라에 가배라는 방적기술 연마 풍속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의료 중에서도 특히 많이 생산된 것은 마포였고, 가는 견사를 날실로 하고 굵은 견사를 씨실로 해서 짠 비단의 일종인 모초도 생산되었다

한복의 소재 - 마포 양의직공도

[신라시대]

관모신라의 복식은 관모에는 복두 상의로는 표의 , 반비, 단의 ,내의 배당이 잇었다. 띠에는 보통의 띠와 용대가 있었고 하의로는 고와 상, 발에는 버선,이 화대가 달린 화를 신었으며 표라는 목수건이 있었다. 통일신라는 문화의 전성기로 복식도 발달. 흥덕왕9년에는 계급적 복식질서를 쥬지하기 위해 복식금제명령이 내려짐.우리고유의 관모인 소골,절풍 대신 진골에서 평민에 이르기 까지 일률적으로 복주를 썼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절상건에서 나온것으로 여겨지며 단석산 공양인물도에서 복두의 모습을 볼 수 있다.표의,바지,저고리 :웃옷으로 표의라는 두루마기가 잇는데 남자의 겨우는 포란이라 하였다. 이포란의 형태는 문관은 옆이 막혀있고 무관은 아래가 한자 정도 틔어 잇어 직책에 잘 어울렸다. 표의는 상하구별없이 통요되었으며 평인은 마포나 갈포를 사용하고 4두품이상은 면주로 하였다.저고리는 흥덕왕 복식 금제에 단의라 기록하고 있는데 그뜻은 요즘의 저고리 처럼 길이가 짧아서 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 내의 는 포를 입엇을때 저고리`를 말하는것과 같다.치마, 반비 배당 : 신라에서 당나라의 복식을 모방하여 상을 입었으나 여자의 치마인 군과는 다른 형태이며 의례용이었던것같다 복식 금제에서는 내상과 표상의 구별이 보이는데 내상은 속치마로 추측된다.반비는 남녀공용으로 소매가 짧으며 전복이나 답호와 같다. <지봉유설>에 보면 배자와 같다고 한다. 배당에도 배자와 같으며 소매가 없다 복식금제에서 보면 6두품에서 4두품까지 여자에게 허용하였던 옷이다.

관모: 남자의 두발을 보면 소년은 매는 형이고 성인은 상투를 틀었으며 머리에 스는 대표적인것은 복두였다

[고려시대]

왕복: 상복,공복,조복,연복,에복이 있다. 상복은 고려도경에 의하면 오사고모를스고 금벽을 수놓은 담황색의소매가 좁은 포를 입었으며 자색 늑건을 띠었다고 기록되어잇다. 여기에 오사고모는 중국천자의 조사절상건은 복두에서 일어난것으로 조선시대의 익선과이 되었다고 한다.공복으로는 자라공복을 입고 상아홀과 옥대를 갖춘다 조복은 평상복위에 복두를 쓰고 속대를 띠며 연복은 조건에 백저포를 입어 서민과 다를 바 없이 우리 고유 복식을 입었다고 한다. 제복으로는 구류면,구장복은 면복인데 이것은 나라의 제향 ,가례등 특수의식에 입는 법복으로 면류관과 거기에 따르는 복식의 총칭이다. 의복만을 할때 십이면류 십이장문을 수놓은 십이장복이다. 제복의 구성을 보면 면류관,면복,상,백사중단,폐슬,수,혁대,옥패,대대,흰버선,붉은신이다. 그런데 제례인 경우에는 방심곡령을 한다. 또 고려말 공민왕 19년 5월에 명의 복제의 영향으로 자주성을 모색해 보고자 중국황제와 동격의 십이류면,십이지장복을 입었으며, 조복에도 중국천자와 같은색의 원유관에 강사포,홍상 백사 중단 강사폐슬 백가대 방심곡령 홍햐대흰버선,검은신을 제정하고 있다. 고종18년 몽고의 침입을 받아 그영향 권에 들어섬..
고려시대 한복

 

민서복: 몽고풍에 비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 졌으며 고름을 매게 되었다. 진사는 사대문락건에 조주구를 입고 흑대를 혁리를 신었다. 농민이나 상인은 백저포에 조선, 민장은 조주구에 문라건,흑각대,오혁리였다. 뱃사람은 바지저고리를 입지 아ㅎ고 죽관에 단갈만 입었다고 하는데, 그형태는 잘 안수 없느나 현재의 승복인 동방과 비슷한것으로 짐작된다.불자는 일반사람들이 좋아하는 청적황배흑의 5가지 색을 제외한 잡색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국사는 납기사에 장수편삼과 자상을 입고 오혁대를 띠면 행전과 같은 금발을 치고 방울 달린 영리를 신었다. 두루마기는 유학자들은 조주구위라는 중국식두루마기를 입엇다. 농공상기인들은 두루마기형의 백저포를입고 속대를 띠었다.

 

[조선시대]

조선중기후기의 임진,병자 양란 후에 실학 사상으로 말미암아 복식에도 실용성을 부여하게 되고 단순화 시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종 21년 갑신정변과 더불어 복제 변경을 단행하였다 개화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복식은 고유복식과 양복의 소용돌이 속에서 끈질기게 그전통을 발전시켜 왔다.

조선시대 왕복

왕복 : 제복으로 면복,조복에는 원유관,강사포,상복에는 익선관,곤료오,첩리,답호가 있으며 전쟁시에 전립으에 융복을 입고 한가히 지낼대는 편복을 입었다.

면복: 왕의 제복및 대례복으로 면류관에 곤복으로 구성된다 면류관은 위모관과 더불어 중국 고유의 관모로 주나라에서 유래된것이다. 면류는 황제가 12류 12옥이고 황태자,친왕은 9류 9옥이며 옥의 색채도 5채옥과 3채옥등을 엮었다.

익선관.곤룡포: 익선관에는 왕의 상복으로 평상 집무때입는 옷이다. 세종 26년 3월 에 사은사 유수강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왕의 상복을 보면 익선관,곤룡포로 기록되어 있다. 익선과은 복두를 모방하여 만든 관모로 탕건위에 썼다.그리고 명사 <여복지>에 기록된 곤룔포를 보면 황제는 황색포에 앞뒤와 양어깨에 용문을 직금하엿고 황태자는 색만 다른 홍색포역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친왕례에 따라 세종조에서 조선 말가지 홍색의 곤룡포를 입었으나 고종의 황제가 된후에는 황색포를 입었다.

사인복 : 사인복은 유관자 아닌 반인 계급의 복식을 말한다.,

남삼,심의 : 남삼은 단령에 선을 두른 형태로 상사의 복식으로 삼앗는데 이것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옷이다. 아울러 생원,진사,창방이 입었으며 앵삼과 같은 것으로 옥색길에 검은선을 둘렀다. 심의는 고대 중국 의 천자 ,제후의 평복이었고 사대부에게는 상복,서인에게는 길복이었으며 유자의 법복이었다 그형태는 백포로 만들어 의 4폭,상 12폭을 서로 연하여 둥근 소매,모난깃,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도련,부리에 검은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굽은 단을 가졌으며 깃,도련,부리에 검은 선을 두르고 복건을 썼다. 여기서는 치마폭의 12폭인 것은 1년 12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심의의 재료는 세포(세마포),명주를 썼으나 툭수층은 비단을 사용하였다. 이옷에 매는 띠오 흰색에 검은 선을 2줄 둘렀으며 매는 방법은 동심결로 맨다.

여자복식


조선시대의 여자 의복에는 저고리 치마 속옷 비롯하여 버선신까지 포함한 평상복과 의식이나 혼레때 입던 적의 활옷,원삼, 당의 등 예복이 있다.

저고리: 조선초기 1530년대의 순천 김시의 갈색명주 솜저고리 는 길이가 70cm이며 1580년 청주 한시의 덧저고리 길이가 70cm이며 1580년 청주 한씨의 덧저고리 길이는 81cm나 되었는데 1616년 판것이고 1700년대의 누비 삼회장 저고리는 길이가 42cm 점점 짧아지고 깃도 당코깃으로 변하엿다 1780년 청연군주의 문단 삼회장저고리는 길이가 19.5쎈티이며 조선만 1900년대의 저고리길이가 극도로 짧아진 때는 14.5센티로 거의 진동선 과 일치하게 되고 진동의 길이는 13센티이며 곁마기는 진동선위로 올라가는데 앞도련이 가장 짧아진 부분의 길이는 12센티밖에 안된때도 잇었다.1930년대의 반회장저고리는 길이가 26센티인데 이때부터 현재의 저고리길이와 비슷한 25~26센티 정도의 기이로 정착된 것을 볼수 있다 이들 저고리의 길이가 아주 짧아지는 변천은 임진란 전 조선 초기의 저고리들과 비교하면 그특징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러한 복식흐름의 성향은 전란 후라는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단순화된것이며 형태는 축소되고 계급적으로 평등화되엇으며 제도적으로 자유화되는 혀낭으로 해석할수 있다,

배자 : 장배자,단배자,배자의 세종류가 있다 장배자는 양옆을 꿰매지 않은 요즈음원삼이고 다배자는 뒤의 다으이를 말하며 반비의 짧은 것이 요즈음 볼수 잇는 배자이다.

갓저고리: 초구라고도하며 중국 혁철족의 복식에 서 그 원류를 볼수 잇다. 갓저고리와 갓두루마기는 상류층에서 입은거 같고 세종11년 2월 사헌부에서는 초구피를 양반자제에게 허용 하였다.

치마 :우리나라 여자옷의 기본인 치마 저고리 의 형태가 다 같이 단일적이면서 저고리에는 다소 변화를 갖는데 비해 치마에는 별로 변천이 없었고 그길이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주기로 유행하였다 속치마는 겹겹이 5~6겹입었는데 처음은 짧게 하고 차례로 길게 하여 겉치마를 입은 모습은 비약한 가슴에 비해 둔부는 종을 엎어 놓은 듯하였고 그 위로 긴 치마가 끌릴 때의 미는 생명력을 갖고 유행하엿던 것을 알 수있다,치마입는법은 반가부인은 외로 여미고 서민 계급은 바로 여며 반상을 가렸다. 색에 있어서는 양반 계급은 어려서부터 출가하여 아기를 낳을 때가지 다홍치마를 주로 입고 중년이 되면 남색치마 노년이 되면 옥색회색 계통의 치마를 입었으나 부부가 함께 살아 있으면 아무리 늙었어도 큰일 때에는 남색치마를 입었다. 노비들은 5세가량까지는 별차이 없이 다홍치마를 중년이후에는 감색이나 고동색을 많이 입었다. 옷감에 있어서 양반은 주로 단 사 주 를 입었으며 고동색을 많이 입었다.

두루마기 :두루마기는 갑오경장이후의 표를 말하며 삼국시대에는 포로 불리었는데 그 모습을 고구려 벽화에서 볼수 있고 신라의 표의 백제 국사의 포가 그것이며 고려 조선시대까지도 남녀 비슷한 형태엿다. 두루마기 원류는 구에서 발전한것으로 보이며 그 복식용어는 조선후기로 보는데 몽고의 xurumakci에서 나왔다고 한다.조선시대의 여자 의복에는 저고리 치마 속옷 비롯하여 버선신까지 포함한 평상복과 의식이나 혼레때 입던 적의 활옷,원삼, 당의 등 예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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